안티기독교활동/아프칸 탈레반 인질사태

2007년 아프가니스탄 23명의 한국인 피랍사건

시골마을 주민 2023. 1. 29. 03:54

교섭이라는 영화로 인해서 2007년 7월에 발생했던 샘물교회 단기 선교 봉사팀이 아프칸 탈레반에게 인질로 피랍되었던 사건이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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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아프칸에 단기 선교 봉사활동을 하러 갔던 샘물교회 단기 팀이 탈레반에게 인질로 피랍되는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평소 기독교에 반감을 품고 있고 당시 사이버 상에서 활발하게 반기독교 활동을 하던 기독교 안티들(안티기독교)은 단기팀의 활동을 비난하며 이들을 해코지하는 활동을 전개합니다.

 

당시 많은 네티즌들이 이용하던 사이월드 미니홈피에 단기팀 참가자들이 올려놓은 게시물 중 전에 아프칸에 가서 활동한 것들 중 선교활동과 관련된 내용을 끄집어 내다가 폭로합니다.

심지어는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탈레반에게 메일을 보내거나

선교활동이나 종교 활동(관광지에서 워십을 하거나 찬송을 하는 등의 활동)을 강조하는게시물을 올린블로그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탈레반에게 이들의 활동이 노출되도록 하였습니다.

 

안티들은 단기팀이 정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프칸 행을 강행했다거나

심지어는 정부서 보낸 송환기까지 거부하고 목적지로 향했다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 유포하였고 많은 네티즌들이 여기에 속았고, 가수 신해철이 이를 근거로 인질들을 비난하는 음성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영화 교섭에 나오는 것처럼 탈레반을 자극했고 협상을 어렵게 했고 인질들이 열악한 처우를 받았고 두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반기독교 정서를 가진 네티즌들의 악의적인 활동이 탈레반을 자극하여 안타깝게 두명의 희생자를 발생시켰고 생존 귀환한 분들도 고초를 겪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안티들이 가짜뉴스를 만들어 가며 기독교의 선교활동과 한국 기독교를 비난하여 반기독교 정서가 확산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사이버 상에서 반기독교 활동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거짓에 바탕한 가짜뉴스 조작 유포, 허위자료로 작성한 악의적인 게시물, 폭력적인 언어와 욕설 비속어 사용 등은 반기독교 정서 확산에 단기적인 효과를 거두었으나 더 이상의 확산을 막았고 이들의 활동을 퇴조시켰고 사이버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온라인 상에서 안티기독교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아래는 영화 교섭의 근거가 되는 23명의 한국인 아프칸에서 피랍 사건의 전개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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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사건1] 2007년 아프가니스탄 23명의 한국인 피랍사건

2명 희생, 21명 무사히 구출

 

 

2007년 7월 13일 #분당샘물교회 배형규 목사 외 분당샘물교회 남녀 교인 19명이 열흘간의 단기선교 목적으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 베이징과 두바이를 거쳐 14일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도착했다.

출국 인원은 (배 목사 포함) 20명이었지만,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선교사 3명이 통역 및 안내 목적으로 합류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동안 총 23명이 움직였다.

이들은 7월 22일에 일정을 끝내고 출국하여 23일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7월 15~18일 마자르이샤리프 지역에서 선교를 겸해 의료봉사와 어린이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나 7월 19일 오후, 카불에서 (정부에서 특히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던) 남부지역 칸다하르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카불에서 170여 km 거리에 있는 가즈니 주 카라바그 지역에서 탈레반에 납치당했다.

참고로 당시 월간 군사잡지 플래툰의 기사에서는 이들이 지나갔던 길을 촬영했는데, "해당 지역을 호위 차량들 없이 버스 한 대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평가했다.

이 소식은 7월 20일 로이터통신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다. 탈레반 대변인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한국군을 21일 정오까지 전원 철군하지 않을 경우 인질들을 살해하겠다"라고 협박했다.

그날로 외교통상부는 국외테러사건 대책본부를 설치했다.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계룡대의 별장에서 군 관계자들과 골프 모임 등을 할 예정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21일 새벽, 급히 상경하여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후 탈레반은 협상 시간을 하루하루 연장했다.

한국 정부가 한국군 철군에 대해 "연말에 철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탈레반은 새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7월 22일 19시까지 한국인 인질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포로)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7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은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에게 전화해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CNN을 통해 인질 석방을 촉구하는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아프간에서 철군하겠다는 계획을 재확인시킨 뒤 카불 현지에 협상단을 급파했다.

7월 22일, 정부 대책반이 카불에 도착해 아프간 정부, 부족 원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직·간접적 접촉과 중재를 요청했다.

7월 23일, 탈레반은 한국 정부와 직접 협상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석방을 요구하는 수감자 수를 23명에서 가즈니주에 수감된 탈레반 수감자 55명 전원으로 늘렸다.

한국 정부는 피랍자 23명 중 여성 18명을 우선 석방시키자고 제안했다.

탈레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7월 25일 끝내 희생자가 나왔다.

탈레반은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선언하고 인질 중 남자 1명을 살해했음을 밝혔던 것이다. 또한, 26일까지 하루 안에 수감자 8명이 석방되지 않으면 다른 인질도 모두 살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26일 정부는 피살자가 배형규 목사(42, 남)을 확인했다.

7월 26일 한국 정부는 백종천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을 대통령 특사로 아프간에 파견했다. 7월 29일 백종천 특사는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을 만나 인질·수감자 맞교환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프간 정부는 불가 입장을 밝혔다.

탈레반이 협상시한을 수시로 변경하고 인질·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7월 31일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심성민(29, 남)이 살해당한 것이다. 탈레반은 수감자 석방에 대한 긍정적인 답이 없을 경우 나머지 인질을 살해하기 시작할 것이라 위협했다.

또 한국과 미국의 군사작전이 시작되면 인질을 살해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과의 대면접촉이 이뤄진 후에야 해결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8월 3일 아프간 주재 한국 대사와 탈레반 측은 직접협상 장소를 정하기 위해 통화했다.

8월 1일과 3일 사망자들의 시신이 각각 인도되었다.

정확한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가 부검을 실시한 결과, 두 사람은 모두 총으로 사살당해 참혹하게 죽었다.

배 목사는 머리에 1발 몸통에 6발, 모두 7발이나 되는 총상을 입었고 심씨는 머리에 2발, 몸통에 2발을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8월 6일 미국 부시 대통령과 아프간 카르자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탈레반에 대한 양보 불가 입장을 재확인했다.

아프간 정부가 인질과 탈레반 수감자 맞교환을 거부하고 미국도 이를 동조하자 한국 정부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탈레반을 설득할 묘안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8월 7일 외교통상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했다.

10일에 처음으로 한국 정부와 탈레반이 대면 협상을 시작했으며, 이는 가즈니주 적신월사(ICRC)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탈레반 대표는 한국인 인질 8명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조건이라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고,

한국 정부 대표는 탈레반 수감자 석방은 권한 밖의 일이라며 탈레반에 인도주의적 차원의 석방을 요청했다.

8월 11~12일 2차 대면협상 과정에서 탈레반은 선의의 표시로 건강이 악화되던 여성 인질 2명 석방을 발표했고 이들은 13일에 석방됐다.

8월 16일 한국·탈레반 대표는 가즈니에서 3차 대면협상을 재개했다. 탈레반이 8월 중순부터 인질·수감자 맞교환 조건을 철회할 의사를 내비쳤다.

8월 27일 한국 정부가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를 3개월 연장 주둔 후 철수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인질 협상은 본격적으로 진척됐다.

마침내 8월 28일. 한국·탈레반 대표는 4차 대면협상을 갖고 인질 19명 전원 석방에 합의했다. 한국·탈레반 협상팀은 ▲아프간 내 한국군 연내 철수 ▲아프가니스탄 내 비정부기구 활동 한국인들 8월 내 철수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 활동 금지 ▲한국인 철수과정의 안전 보장 ▲탈레반 수감자 석방 요구 철회 등 5개 조항에 합의했다.

이후 8월 29일 인질 12명이 석방되었고, 30일에는 나머지 7명이 모두 석방되었다. 피랍된 지 42일 만이었다. 먼저 석방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생존 인원 19명은 9월 2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를 투입하여 구출해 오는 방법과 협상 중에서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고, 미군 역시 구출을 위해 특수부대를 준비시켰다. 하지만 현지의 미군과 신생 아프간군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첩첩산중의 땅굴 속으로 병력을 투입하면 말 그대로 대규모 대 게릴라전이 되어 인질은 인질대로 죽고 특수부대는 특수부대대로 피해를 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성공한다고 해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으므로 결국 협상을 통해 인질들을 빼오는 길을 택했다.

그나마 이라크에서 날뛰면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는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질의 목을 자르는 이라크 무장단체 유일신과 성전과는 다르게 당시의 탈레반은 최소한의 협상의 여지는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실제로 특전사 대테러요원들이 아프가니스탄 현지에 급파되어서 인질 구출 작전 준비를 했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 아카이브 결국 협상 타결로 인질들이 석방되어서 실작전 투입은 되지 않았지만 구출 계획 구상을 위한 억류 지역의 지형 정보 조사, 탈레반 무장세력의 이동 경로 및 은거지, 동향 등의 첩보 수집과 무기 분석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 인질이 무사히 풀려나는 데 일정부분 기여한 공로로 인정받아 그 특전사 대원들 중 일부가 훈장 및 표창을 받았다.

정부의 인질 석방 노력을 적극 지원하도록 카불로 파견된 군사협조단 또한 공로를 인정받아 카불 군사협조단장을 맡은 육군 준장 전인범 장군 등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아예 특전사 1~2개 여단을 투입해서 현지에 있는 미군,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국제안보지원군의 협력을 받으며 가즈니 주의 탈레반을 소탕하려는 작전도 합참이 구상했었고,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까지 이런 방안이 보고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