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언론회가 주관한 안티기독교 세미나를 마치고 저자가 올린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앞의 글에서는 안티기독교가 대두된 배경과 원인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면 이번 글은 세미나의 의의와 교조화된 안티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편의 글을 옮깁니다. 색깔로 강조를 한 것은 편집자가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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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의 문법을 이해하자(안티 세미나를 마치고) 비정규기독교 2007.11.25 18:39 | 이혼주례전문 |
내가 아는 한에서는 한국 최초로 보수교단들이 안티와 대화를 시도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9월에 내가 이 행사를 교회언론회측에 제안했을 때 성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양쪽 모두 깊이 생각하느라고 결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양쪽 다 내부에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이 되어서 20 일에 세미나 예비모임으로 반기련 회장을 포함한 발제자들이 만나서 여러가지 가능성과 예기되는 문제점들을 검토 했다. 기자들이 많이 올 터인데 돌출 과격 행동이 발생 한다면 피차에 유익할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서 서로들 조심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양쪽 모두 체계적으로 통일된 조직이 아니어서 혹시 맛이 간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줄 몰라서 염려했는데 결국 우려 했던 대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서 양쪽을 다 긴장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예기치 곳에서 발생했다.
행사 2 시간 전에 언론회의 이사 목사님들이 뒤늦게 내 발제 원고를 읽고서 나에게 "당신 프락치 아니냐?"고 몰아붙이며 발제를 할 수 없다고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순간나는 “어떻게 알았지?”하는 당혹함이 있었지만 “당신들은 한글도 못 읽느냐? 해학과 풍자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되받아쳤다.
동시에 안티와 대화하려면 ‘안티의 문법’을 이해해야 한다고 교육을 시켰다. 교육의 효과가 있었는지 나중에야 ‘우리는 이해하지만 한국 교회와 매스컴에 당신의 발제 자료가 배포되면 오해가 생길 것을 우려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다비아와 사랑방에 이미 실린 자료도 공개하지 못할 정도로 보수적인 한국교회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 그야말로 황당시츄에이션이었다. 나도 보수교단들을 배경으로 하는 주최 측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어서 결국 자료 배포 없이 구두로만 발제를 하기로 했다.
그래도 보수 교회 단체로서는 엄청난 시도를 한 셈이어서 그분들 마음 고생이 무척 많았을 것이다. 아마 마치 수류탄을 안고서 줄넘기 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짧은 네 발표가 끝나니까 사회자가 '롤라코스트'에서 내린 심정이라고 했을까.
이번에 내가 한국에 온 이유를 설명하자니 자연히 만나는 사람마다 안티 세미나에 대하여 설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상상외로 안티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온라인선상에서 느끼는 것보다는 상황이 심각한 것 같지 않은 것 같다.
당장의 자기 목회에 지장이 없으면 태산이 무너져도 무신경한 한국형 목회구조 속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안티들이 악령(?) , 혹은 성령(?)충만 받아서 더 열심히 전도를 해야 할 것 같다.
안티에 대한 나의 개인적 소감은 한 마디로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19:40)’이다.
사실 내 속마음은 이번 기회가 안티의 주장이 널리 알려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안티도 실전을 통해 좀 더 성숙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일반적으로 안티진영의 기독교 비판은 성급한 일반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기독교측이 안티진영의 비판을 반박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존경받아 마땅한 성실한 진짜 성직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향력은 비판받는 몇몇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중국제라면 무조건 불신 당하는 식품과 같다. 중국제라고 좋은 것이 왜 없겠나?
반대의 예로 기독교 측에서는 기독교의 공과 과를 말 할 때 ‘민주화의 공헌’을 말한다.
그러나 민주화에 공헌한 기독교는 0.1도 안되고 불교도 그 정도는 했다.
대다수의 교회는 민주화 과정에 에 저해요소 혹은 무관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 없이 한국교회의 민주화공헌을 운운하는 것은 표 없이 버스 탄 것 같은 무임승차인 것이다.
안티는 오버가 심하다. 원색적이다.
정작 19 세 이하 접근금지에 해당될 곳은 성서가 아니고 안티의 사이트가 아닐까 염려 된다.
왜냐하면 정신위생건강상 해로운 표현이 넘치기 때문이다.
정제되지 못한 거친 감정의 배설 덩어리가 굴러다닌다.
현재 상태대로라면 안티의 안티가 생길 뿐이다.
안티는 ‘기독교 박멸’을 외치는데 모름지기 종교란 어떤 종교이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외부적 충격이 오면 더 강해지게 되어 있다.
2000년 기독교역사는 참고할 필요도 없이 오늘 현재 무서운 중국 공산당의 박해가 파룬궁을 더 확장시키는 것을 보라.
결론적으로 내 느낌으로는 안티가 공개적으로 알려지는 자리로서 이번 세미나는
그동안 안티를 몰랐던 많은 이들에게 오히려 실망을 안겨주는 자리였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그동안 욕을 너무 먹어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데 안티는 공감을 얻기 보다는 집단 히스테리적 정신병리현상을 만방에 보여준 기회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 증세는 그동안 기독교가 보여준 자본주의 사회병리현상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것이지만.
보수교회 목회자들이 안티의 문법을 이해해야 하듯이 안티 또한 기독교와 대화하려면 기독교문법을 이해해야 했다.
안티가 좀 더 세련되고 부드럽게 나왔으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 성과가 있었을 것을 아쉬워 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박멸론‘을 보자. 기독교도 ’미신타파를 주장하지 않느냐‘식의 논리는 설득력 없다. 세계의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미신타파는 문명발달에 따른 필연적 사건이고 기독교의 피해는 역사적 오류이다. 이의 평면적 비교는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누가 지적했듯이 적어도 효과적인 안티라면 반사회적인 기독교인들을 실정법의 법정에 불러 세우는 내공이 있어야 한다. ‘나 예수쟁이요’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진실함도 있어야 할거다..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정신위생상 건전하지 못한 모습이 아니라.
한 마디로 안티는 실망스러웠고 보수는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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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반대되는 두 가지 사상이 한 사람에게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것이다.
최근에 내가 깊이 빠진 인물이 기독교 문화 속의 유물론자로 자처하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직 그에 대하여 충분히 알지 못하고 이제 막 공부를 시작 했지만 정말로 흥미가 가는 사상의 곡예사인 느낌이다.
지젝은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적 신념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갖 도덕적 형태를 취하며 순응주의를 조장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 기독교적 경험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과 최근 15년간 세계의 사상계를 흔들만한 26권의 책을 써 낸 천재에 대하여 나 같은 범부가 무엇을 알 수있겠는가마는 정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기독교’와 ‘유물론’을 조합한다는 것에서 비상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번 안티와의 토론회에서 내가 모색하고자 했던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안티는 도대체 남의 집에 초청을 받아가는 사람으로서 기본이 잘못되었다. 어렵게 준비를 해서 자기를 초청해서 대화를 해보자는 사람들에게 싸우자고 덤벼드는 수준이었다. 남의 집에 초청을 받았을 때는 임전태세 보다 세련되고 부드럽게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워낙 트집을 잡기 좋아하는 이들이라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 싸움이란 물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다. 평소에 보지 않을 때는 막되어 먹은 주장을 하다가도 일단 상대가 초청을 해서 얼굴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할 때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서 말을 가려서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걸러지지 않은 인터넷 배설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토론에 임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절대악인 개독교의 위선 때문에 치가 떨렸을지도 모른다.
악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더 거대한 악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독교가 싫어서 기독교가 지키지 못한 소중한 가치까지도 버리려고 하는가?
'때려잡자! 공산당!', '타도하자! 전두환!'
한 때 이런 구호가 많이 외쳐졌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도 때려 잡히지 않았고 전두환도 타도되지 않았다. 모두 변화할 수 에 없는 시점에 가서 스스로 변했다. 물론 구호를 외치던 세력이 상황을 변화 시키는데 큰 힘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구호는 구호를 외치는 편에서 의지를 표현하기 힘을 모르게 위한 자가발전성격이 강한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의 '기독교 박멸!'구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보수 측은 어떤가?
세미나 직전에 나의 발제문을 보고서 토론회의 최초 기획자인 나에게 사기를 쳤다며 "당신 프락치 아니냐?"고 흥분을 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이사는 ‘천민자본주의’라는 단어 하나를 보고 “ 목사님은 '계급투쟁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군요.”라고 했다.
도저히 대화가 안 되는 상대였다.
이 땅에 온갖 피해를 가져오는 이런 꼴보수는 박멸되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방법은 무력화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적, 원색적, 히스테리적 안티 운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제 3자가 보아서 객관적 시각으로 동의 할 수 있는 공정함을 갖춘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문자주의에 더 지독한 문자주의를, 배타주의에 더 악에 바친 배타주의(기독교박멸)를 택하여 다툰다면? 결론은 물량적인 싸움일 뿐. 물량적인 싸움에서는 안티는 기독교와 상대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나치가 보기 싫은 유대인을 보고 미쳐 돌아갔듯이 잘못하면 집단성 히스테리가 될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보수 기독교를 이기려면 문자주의에는 성서본문비평을, 배타주의에는 포용주의를 가르쳐야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 토론회에서 안티 대표가 한 말중 쓸 만한 것은 '신학교에서 성서 본문비평을 가르치지 않느냐?'는 질문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아! 언제 쯤 이 땅에 대화 가능한 안티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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