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기독교활동/안티기독교의 활동

안티를 돌아 보며(러셀) - 안티기독교 역사

시골마을 주민 2011. 8. 22. 23:56

러셀은 사이버 공간에서 태동한 안티기독교의 초창기부터 활동한 중견 핵심 안티로 반기련의 창립멤버이며, 2005년 반기련에서의 갈등으로 이드, 문비, 옹기, 광복군 등 몇몇 동지들과 종비련을 창립하여 분열하여 나간 후 시민운동을 표방한 온건한 안티기독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드가 종추련을 차려 나간 후에도 종비련을 지켰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이 몇년간을 지내다가 종비련을 해체하게 됩니다.

아래의 자료는 종비련 창간호에 러셀이 기고한 글로 비록 안티의 시각에서 러셀 중심으로 씌여졌지만 우리나라 안티기독의 형성 과정을 알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라 생각되어 이곳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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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를 돌아 보며

 

들어가면서


나는 러셀이라는 필명으로 길다고 하면 긴 6여 년 동안 소위 기독교 "안티" 활동을 해왔다. 그 중 상당기간 안티 운동을 주도해 왔으며, 나름대로의 성취감과 보람도 느낀 적도 있지만, 반면에 그 동안 발생했던 여러 가지 반목과 분란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 또한 금할 수 없다.

어쨌든 그 동안의 수많은 사연을 다 알 수도, 다 기억할 수도, 다 밝힐 필요도 없지만, 스스로의 변명 삼아, 그리고 회원 여러분들께 참고가 되라는 의미에서 나의 안티 활동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반기독교 운동 간략사

 

우리나라에서의 반기독교 운동은 일제 치하인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기독교 관련 신문에 반기독교 운동에 대한 우려와 대책에 대한 기사가 나온 정도이고 보면 상당히 조직적이며 광범위하게 이루어 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서 소수 세력이었고, 그에 따라 반기독교 운동도 그다지 큰 파장을 불러오지는 못한 듯하다.

해방 이후 특히 7~80년대, 종교우대 정책으로 기독교는 비약적인 세력 확장을 계속해 오는 과정에서도 이따금 개별적인 반대활동이 있었을 뿐 조직적인 반기독교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질적인 반기독교 운동의 태동은 90년대 초반, pc통신 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다. 하이텔, 유니텔, 천리안 등의 토론게시판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각 게시판에 기독교를 선교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이에 반발한 일반인들은 그 선교하는 글들에 대해 반박하면서 논쟁하다가, 기독교인들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념에 질려버린 일부 논객들에 의해서 선교에 대한 반박을 넘어서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스테어>라는 탁월한 논객이 활동한 것도 이 시기다.

 

90년대 후반, 고속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반기독교 운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안티기독교 홈페이지가 생기면서 그 동안 심정적으로만 반감을 품고 있던 많은 네티즌들이 일제히 불만을 토하게 된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안티" 라는 용어가 지금까지 반기독교 운동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 동안 품어왔던 반기독교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 내면서 그에 따른 욕설과 인신공격이 난무하게 되고, <안티 = 욕쟁이>라는 등식까지 성립하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몇 몇 의식 있는 "안티"들은 스스로 인터넷사이트나 다음카페를 개설하게 된다. 십자불꺼, 안티예수, 클럽안티기독교카페, 기독교비평카페 등이 개설되면서 단순한 반감을 넘어선 기독교라는 종교의 행태, 경전, 도그마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많은 네티즌 논객들의 주옥같은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석동신의 오경해제>, <이상훈의 바이블의 진실>, <분석가의 기독교비평FAQ>, <적그리스도의 안티바이블> 등 "안티이론" 이 정립된 시기도 바로 이 때다.

티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의 [ 예수는 신화다 ]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 이리유카바최가 쓴 [교회에서 쉬쉬하는 그리스도교 이야기] 등의 기독교 비판 서적이 안티들의 필독서가 된 것도 그 무렵부터였고.
그러나 욕이나 인신공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다음 넷 관리 측으로부터 카페 폐쇄 경고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퍽" 이나 "해킹" 등으로 안티사이트를 공격하고 파괴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기독교인들의 온라인 공격에 대비하여 기독교비평카페에서는 모 고등학교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비밀 카페를 만들어 자료를 별도로 모아 놓고 회원들만의 비밀 정보를 교환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독교인들의 온라인 공격에 불안감을 느낀 "안티"들에게 묘한 관념이 생기게 된 것이다. 기독교라는 거대한 권력을 상대로 저항운동을 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따라 "안티"들은 신원확인이 안된 신규 회원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조금만 이상한 글을 올리거나 행동이 보이면, 즉각 "기독교프락치"로 몰아 부치고 욕과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 습성이 생긴다.

물론 이런 습성의 근본원인은 기독교인들에 의한 것이지만, 이로 인해 일어난 많은 폐해와 선의의 피해자에 대해서 오직 기독교인 탓으로 돌리는 것도 불합리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러한 습성은 고쳐지기는커녕 더욱 심화된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개설과 폐쇄를 거듭하던 안티사이트(카페)는 안티 서적의 발행을 주관한 클럽안티기독교카페(클안기)를 중심으로 대체적인 통합을 이룬다.

특히 내부 분란으로 와해된 "안티예수" 로부터 제삼자(이계석 선생), 이상봉 박사, 손오공(이드), 권광오 등 걸출한 논객들이 합류하면서 더욱 강화된 "클안기"는 오프라인 야외활동을 전개하여 "안티기독교"의 존재를 사회에 알리고 기독교의 폐해를 부분적이나마 일반인들에게 홍보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러한 "클안기"의 발전은 반기독교운동이 시민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이라는 안티기독교 단체가 탄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기독교비평카페, 한토마의 종교방 등 일부 안티모임이나 종교토론 모임은 그들 나름대로의 노하우와 훌륭한 이론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잘 유지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분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러셀

"안티"도 사람으로 구성된 모임이며, 사람으로 구성된 이상 분열과 통합의 과정, 인간적인 아픔과 상처를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분란과 진보를 거듭해 온 "안티운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러셀이 있었고, 그도 역시 많은 아픔과 상처를 겪었다. 물론 단순하게 러셀이라는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과 리더십의 부족으로 치부해 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사실을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또는 다른 관점으로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차원에서 "안티의 분란" 과정을 최대한 사실대로 서술해 보려 한다.
첫 분란은 "안티1호 서적" [우리는 왜 기독교를 반대하는가] 출간 과정에 있었다.


2002년 1월, 안양에서 <쥐뿔>과의 만남을 통해 안티서적 출간의 필요성을 크게 느낀 러셀은 그 길로 "기독교비평카페"에 모인 글들을 가지고 출판할 계획을 세운다.

원래 <적그리스도의 안티바이블>을 염두에 뒀으나 <적그리스도> 본인의 반대로 포기하고 <분석가의 FAQ>를 중심으로 안티들의 좋은 글들을 모아 나갔다.

상당기간 편집기간을 거쳐 일차 원고를 완성한 후 "기독교비평카페"(기비평)의 운영진과 상의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 즈음에 공교롭게도 <대치우천황> 과 <구경꾼>등 카페 운영자들이 바쁘거나 또는 책 출간을 회피하는 모습이 비쳐졌다. 이에 실망한 러셀은 "기비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클안기"에 책 출간 의사를 타진하게 되었고, 당시 "클안기" 운영자였던 <신의사자>에 의해 흔쾌히 받아 들여졌다. 그리고 몇 회에 걸친 원고검토, 그런데 그 과정에서 "기비평" 의 몇 사람에 의한 반대의사가 표출되었다.

책 출간 자체에 대한 회의론부터 출판 부수에 대한 이견도 나타났다. 하지만 첫 분란은 개인적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고, 단지 논란으로 그치게 되어 그 부작용이 크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 당시 분란의 중심에 러셀이 있었으며, 그리고 2003년 8월 15일, "안티서적 1호"가 출간되었다.

 

두 번째 분란은 "기비평"과 "클안기" 운영진간의 사소한 말다툼이었다.
기비평 운영진 중 한 사람이 클안기 회원과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두 카페 사이에 감정충돌이 빚어졌다. 그런데 그 사이에 <칼츠>라는 정체불명의 회원이 끼어들게 되고 이로 인해 두 카페 사이의 감정충돌은 더욱 예리해졌다. 당시 혜성처럼 나타난 칼츠는 예리한 논리와 문장력으로 짧은 기간 동안에 안티논객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소위 신예안티였다.

자신의 말로는 회의주의자 카페에서 활동했다고 하지만, 그가 말한 회의주의카페에서 그의 흔적을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그야말로 그림자 없는 사나이였다.

 

나중에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서 <칼츠>가 가공의 인물이었다는 것으로 추정되고, 그것을 창조한 범인도 상당한 근거 하에 추정되었지만, 다만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아무튼 두 카페의 운영진간의 싸움에 끼어든 <칼츠>에게 러셀은 끼어들지 말기를 권했고, 이에 반발한 칼츠가 러셀에게 따지게 되었다. 약간의 언쟁이 오간 후, 감정이 격화된 칼츠는 클안기를 탈퇴하고 자신의 글을 클안기 게시판에서 모조리 다 지운다. 그런데 너무나 공교롭게도 그 직후 칼츠는 음주운전한 차에 동승했다가 사고로 세상을 등지게 된다. 아니 칼츠를 창조했다고 의심받는 인물에 의해서 그렇게 알려 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어쨌든 당시에는 칼츠의 죽음이 러셀 탓이라는 말들이 오가게 되고, 이로 인해 러셀은 한동안 괴로워한다. 만약 칼츠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진실이라면 칼츠를 창조한 그 범인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셈이 될 것이다. 어쨌든 그 분란의 중심에 러셀이 있었다.

 

다음은 오프라인 활동과 관련한 분란이다.
책을 출간하고 일정수준의 안티사이트 통합을 이룬 "클안기"는 대규모 오프라인 행사를 계획한다. 한강시민공원 여의도 지구에서 안티 홍보활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만 해도 안티들은 기독교인들의 테러에 대한 상당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 동안 기독교계통 광신도들의 광적인 행태를 익히 보아온 터에다가 온라인은 통한 기독교인들의 공격으로 상당히 민감해져 있는 상황이라 그 정도의 우려는 근거 없다고 만은 볼 수 없는 일이었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다지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우선 광신도들의 광적인 행동은 언제나 극히 일부의 사이비에 의해서 나타났고, 더군다나 드물게 있어온 테러는 특정인이 특정 사이비교단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공격했기 때문이지 일반적인 반기독교 운동으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신의사자>와 러셀은 몇몇 반대론자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는 "준비도 안 된 병사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가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장수"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상당한 대규모 분란이었다. 어쨌든 그 당시 분란의 중심에 러셀이 있었으며, 그리고 2003년 10월 3일, 첫 대규모 야외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행사는 기독교계 언론인 <뉴스엔조이> 와 <한겨레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반기독교운동을 시민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을 창설하는 과정에서는 폭넓고 다양한 분란이 발생했다. 한강시민공원에서 대규모 오프라인 활동을 성공시킨 클안기는 여세를 몰아 그 해 11월부터 매주 토요일, 대학로에서의 대국민 홍보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시민운동의 출범을 알리는 33인의 서명과 발기식도 가졌다.

 

이제는 실질적으로 시민운동을 현실화하는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러셀은 당시 "개박연"이라는 안티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던 <옹기쟁이>를 만난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반기련"이라는 사이트 제작에 합의하고 <antichrist.or.kr>이라는 도메인을 구입한다. 반기련 창설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논쟁과 분란이 있었고, 역시 그 분란의 중심에 러셀이 있었으며, 그리고 2004년 1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라는 단체가 출범하게 되었다.

마지막 분란은 소위 "영자의 난"으로 일컬어지는 반기련 분란이다.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 분란의 주원인은 "노선차이"다. 회원들 간의 여러 가지 오해와 악성루머, 소문들이 있었지만 모두 지엽적인 문제들일 뿐, 핵심은 반기련의 정체성과 방향성이다. 러셀은 안티가 아닌 이름으로 반기독교운동을 사회에 접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러셀의 착각이었고, 안티는 그 특성상 조직화 되고 체계화되기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안티의 역할은 인터넷상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관련하여 결국 러셀은 옹기쟁이와 문학비평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지막 반기련 분란의 중심에 또 한 번 러셀이 서게 되었으며, 수년간 정열을 바쳤던 안티와 결별하게 되었다.

 

안티를 버리고

러셀은 이제 "안티"라는 명칭을 버렸다. 수년 동안 앞장서 주도해 오던 일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단순한 비판이 아닌 안티라고 해야 할 정도의 적극적인 비판은 내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늦었지만 이제 알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기독교운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요 그 동안의 안티활동을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안티는 나름대로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왕성한 안티의 열정을 보이는 분들께는 감사와 존중의 마음을 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충고의 말은 꼭 전하고 싶은 것은 아직도 남은 러셀의 안티에 대한 미련 때문일지 모른다.

 

비판은 괴로워

어떤 대상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한다는 일이 일견 당연해 보이고,
사회 정의구현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은데,
이 놈의 비판이란 게 받는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하는 사람도 자못 괴로운 일인 듯하다.
"남의 눈에 눈물 내려면 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야 한다"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대상을 닮아간다.
독선을 비판하면서 더한 독선으로 피폐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쯤 돌아보라,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나의 약점을 감추려는 분노와 불안감,
상대의 고통과 불행이 나의 만족으로 다가 오는가?
그렇지만
진정 사회가 필요로 하고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정당한 비판이라면,
그것이 그런 불행을 안겨 줄 리가 없지 않은가?
혹시 지금 내가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일이,
진정한 비판의 한계를 벗어나 폭력행위에 속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거울을 한 번 들여다보자.


오00 (종비련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