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대응책

[스크랩] `교회성장` 2월호에 실린 안환균 소장의 특집 원고, `한국의 안티기독교 현상과 변증전도`

시골마을 주민 2017. 12. 28. 08:52



이제 그들도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안티기독교 현상과 변증전도



현재 한국교회는 전도에 굉장한 열심을 내지만 실제 성공률이나 정착률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동원 주일에 수백 명이 초청되어 오지만 그 다음 주일에 교회에 재참석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게다가 기존의 한국교회 성도들은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이원화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세인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전도와 목회 현장에서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동안의 전도방식들이 시대 분위기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피상적인 데 머물러왔던 결과는 아닐까? 또는 성경에서 원래부터 강조해온 전도의 방법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취급해온 탓은 아닐까? 그래서 지금과 같은 한국교회 전도현장의 위기를 타개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성경이 중시하는 좀 더 전인적인 복음 전도의 방법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복음은 올바로 균형 있게 전해지면 늘 새롭고 생명력이 넘친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지금은 복음을 듣는 데 식상한 사람들마저 꽤 많아 보인다. 복음이 아주 흔해졌다고 하지만 정작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고들 한다. 복음에 감격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이 복음 자체가 신선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해주는 방식이 시대적으로, 성경적으로 적절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자충수라고 본다.






도를 넘어선 안티기독교 현상


요즘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는 이제 더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곱게 봐줄 마음이 없다. 이전에는 적당히 묻어버리고 지나가던 의문점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신랄하게 질문해온다. 그 대답에 자신이 이해할 만한 논리가 부족할 때는 가차 없이 비판하거나 인터넷 공간을 빌려 악성 댓글로 공격해온다. 


더구나 요즘은 안티기독교인들을 포함한 기독교 반대 세력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영향으로 부모를 따라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몸담고 있거나 평소 기독교에 회의적인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의 탈선이 부추겨지고 있다. 


특히 안티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진리 자체의 배타성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배타성과 비윤리적인 삶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총체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다. 주로 인터넷상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자주 올리면서 우리 사회에 기독교에 대한 비호감적 여론을 선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안티기독교 현상은 이제 하나의 사회 현상처럼 두드러지고 있는데, 파급력이 큰 인터넷상에서 주로 활동하는 이들은 포털 뉴스 등에 기독교 관련 기사가 뜰 때마다 극단적인 기독교 혐오성 댓글로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 


이들의 댓글에서 기독교인은 개독이며, 하나님의 이름은 개독신, 목사의 명칭은 먹사다. 예수, 성경, 기독교 자체가 거짓이고 잘못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결과로 지금의 개독교인상이 빚어졌다고 본다. 반기독교 이전에 반인륜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나 존중이 결여된 막무가내식 태도나 언행도 여과없이 드러낸다.


이들의 공격은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회자들의 그릇된 행태에 집중된다. 목회자의 간통, 성폭행, 금전문제, 권력형 비리,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세습, 목회자 독재, 교회의 비민주적 운영, 재정 불투명, 납세 거부, 호화로운 예배당 건축, 개교회주의 등을 공격하면서 결국 이런 교회 지도자들을 따르는 성도들의 신앙 또한 어리석은 맹신이라고 공격한다.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주로 사회에 기여하려 하기보다 이기적인 기복 성향을 보이는 그들의 반사회성, 믿음을 빙자한 비상식적 처세, 복음 전도 현장에서의 배타적, 강압적인 태도 등이 단골 공격 메뉴다. 


안티기독교인들의 활동 목적은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바로잡자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대표적인 안티기독교 사이트인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이 내세우는 구호대로 ‘개독 박멸’이 이들의 목적이다. 그래서 매우 호전적이고도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걸러지지 않은 비속어와 욕설을 그대로 인터넷 공간에 남발한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로 타 문화와 종교에 대한 멸시와 폄하를 일삼는다고 보는 것으로 기독교에 대한 자신들의 모든 신랄한 공격을 정당화시킨다. 요즘 일어나는 교회의 갖가지 사건들을 교회사 속에 드러난 비슷한 사건들로까지 엮어내 기독교 전체를 비난하는 나름의 역사의식까지 갖춘 이들도 있을 정도로 치밀함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대체로 한 가지 사례를 들어 전체 기독교인 비난으로 확대 비화시키는 지나친 일반화가 상습적인 데다 선정적이고도 자극적인 과대포장, 침소봉대가 많다. 결국 조작된 유언비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종종 억지스런 논리의 비약도 서슴지 않아 특정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차근히 따지기보다 자기 생각을 먼저 내뱉고 보는 이들도 많은 분위기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들을 의도적으로 비사회적인 존재로 몰아붙이려는 시도도 많다. 멀쩡한 공인도 기독교인이라고 알려지면 그때부터 밉상이 된다. 알려져 있지 않던 단점들도 이곳저곳 다시 다 뒤져 끄집어내 이슈화시킨다. 기독교를 아무리 죄를 지어도 회개하기만 하면 되는 속 편한 종교로 인식시키기도 한다. 나름대로 합리적 지성인을 자처하는 그들로서는 기독교인 또한 사회 속의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권의식을 가질 만도 한데 기독교인에게만은 예외다. 어떻게 보면 전체주의, 집단주의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이들은 ‘네이처’나 ‘사이언스’, BBC 같은 데서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오면 어떻게든 무신론적 진화론과 연결시켜 기독교의 창조론을 공격하기에 바쁘다. 무신론적 진화론을 애물단지처럼 껴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믿는 식의 과학적 물질주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 시대적으로 이들에게 균형 잡힌 성경적 창조론 변증이 절실한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들보다는 좀더 점잖은 중도 성향의 비판자들도 적지 않다. 기독교가 적어도 일반은총의 상식선은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 최저선도 못 지키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다. 기독교인이 자기 종교의 도그마에 갇혀 세상 속에서 건전한 사회인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는다는 데 대해 사회적 양심 차원의 비판의식을 가진 이들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 예수님은 인정하나 기독교인들이 그 가르침대로 올바로 살지 못한다는 비판이 한 발 더 앞선다. 예수는 그럴 리 없고 그렇게 시켰을 리도 없는데 기독교인들이 잘못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기독교에 비호감인 건 아니지만 신자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의 진정성 여부를 저울질해보려는 구도자형의 부류도 이 그룹에 속한다. 참된 회심을 경험한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많아지고 기독교 진리 자체에 대해 세상 사람들도 인정할 만한 공통분모와 접촉점을 살려 합리적인 대응 논리에 초점을 맞추는 변증전도가 적절히 이뤄지면 복음 전도도 가능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변증전도, 포스트모던 시대의 쌍방향 소통 전도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데 익숙한 우리 사회의 안티기독교 현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포스트모던 문화와 시대정신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예전과 같은 전도방식, 곧 기독교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내용을 잘 정리해서 다소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달해주는 전도 방식은 이제 한계에 봉착해 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특정 패키지를 묶어 미리 정리된 간단한 말 몇 마디를 전해서 전도하고 한 영혼을 회심시킬 수 있다고 믿던 시대 또한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이 기존의 전통과 권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이전보다 이래저래 따지고 묻는 질문을 더 많이 해온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 전통의 권위에 그저 맹종하듯 따르기보다는 자기만의 의문을 풀기 위해 그 권위의 정당성에 대해 합리적인 잣대로 차근히 살펴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교회가 오히려 이러한 틈새를 잘 이용하면 복음을 전하는 데 더 유용한 때일 수도 있다. 


변증이란 말은 원래 ‘변론함으로써 증명한다’는 뜻이다. 교회사적으로 기독교 변증은 기독교가 비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에게 증명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변증전도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기독교 변증의 좋은 자료들을 복음을 전하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도법이라고 할 수 있다.  


변증전도의 가장 중요한 핵심원리는 전도 대상자가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하나님 앞에서 꼭 지녀야 할 질문을 갖게 해주고, 그러고 나서 복음이라는 해답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데 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대로 “세상사람들이 신자가 가진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올 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15)는 명령에 성경적 근거를 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존의 사영리나 전도폭발에서 전도 대상자에게 다가갈 때와는 좀 다르게 접근한다. 사영리 전도는 처음 전도 대상자에게 접근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전도폭발은 “만약 당신이 오늘 당장 죽는다면 천국 갈 자신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시작한다. 


아쉽게도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기독교가 문화화된 서구에서 나온 것들이다. 하나님이나 예수님, 성경 같은 기독교적인 용어에 익숙하고 기독교적인 분위기도 오랫동안 자리잡혀온 곳에서는 하나님이나 천국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며 던지는 이런 질문이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에 대한 선이해가 여전히 충분치 않은 한국에서는 이런 접근법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주거나 막연한 의문만 더해줄 수도 있다. 


한국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로 접근하면 대뜸 “하나님이 있어요?”라고 되묻거나 “하나님이 왜 나를 사랑한다고 그래요? 내가 사랑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라고 반문해오기가 쉽다. “만약 당신이 오늘 죽는다면…” 하는 식의 접근도 사람에 따라 “멀쩡한 사람보고 왜 재수 없게 죽는다니 뭐니 그런 말을 하냐?”라고 기분 나빠하거나 “천국이 정말 있어요? 가 봤어요?” 하는 말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변증전도는 전도 대상자들에게 접근할 때 그들의 입장에서 반응해오기 쉬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신이 교회에 나가거나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오해나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접근하면 관심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손사레를 치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겠지만, 무언가 자신에게 할 말은 있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질문인 만큼 대체로 사람들과 말문을 트는 데 무난한 접근이 된다.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전도하거나 교회 나가자고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요즘 교회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도 할 겸해서 괜찮으시다면 한번 문의드려 보는 것입니다”라고 정중하게 부언을 하면 그리 무례한 태도로 비치지도 않는다.


요즘 지역교회들의 새가족반에 참여하는 새신자들 역시 대체로 질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만큼 고학력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에 대해 갖는 의문의 범위도 넓어지고 지적인 차원의 답을 찾으려는 요구도 높아졌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목회 구조 안에서도 특별히 새신자, 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가족반 등을 운영할 때 변증전도적 접근을 다각도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새가족반 이후의 양육이나 제자훈련과 같은 전반적인 교회 사역의 구조에도 변증전도의 방법을 접목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양육 과정에서도 인도자가 평소 정리해놓고 있던 교육 내용들을 그냥 쭉 전달하려 하기보다 먼저 초신자나 새신자, 훈련생이 평소에 삶과 신앙에 대해 가진 의문점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고 거기에 맞춤답변을 해주는 것으로부터 흥미를 유발시키며 교육을 진행할 수 있다.


무엇보다 목회자들이 목회현장에서 신자나 초신자, 비신자들이 각자가 가진 의문점들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하고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소통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이런 목회구조를 지향하다보면 설교도 일방적인 선포 형식보다 질문에 응답하는 대화 형식으로 쌍방소통의 분위기를 띠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지금 섬기는 그말씀교회에서 주일설교를 주로 변증설교로 전한다. 신자나 비신자가 신앙생활이나 기독교 진리에 대해 많이 품고 있는 의문들을 질문 형태로 만들어 매주일의 설교 제목으로 삼는다. 설교는 그 질문에 대답해주는 내용으로 전개하는데, 성도들이 설교에 흥미를 갖고 집중케 하는 데 효과가 크다. 설교에서부터 이런 대화 형식의 소통을 중시하면, 양육이나 제자훈련에서도 훈련 대상자들을 인도해나가는 데 훨씬 더 부드럽고 융통성 있는 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청소년 주일학교 부서나 청년 모임, 장년을 위한 구역모임이나 다락방 소그룹 모임에서도 리더의 인도 아래 서로 평소 신앙생활 가운데 품게 된 의문이나 질문을 나누고 함께 답을 찾아가보려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믿음이 더욱더 전인적으로 성숙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기독교 진리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하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갓토크'(God Talk)라는 이름의 변증전도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져왔다. 지금은 이러한 전인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진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변증전도모임에 관심을 들일 필요가 있다.



   

<7문7답 전도지>, 변증전도의 매개체


지금 한국에서는 이전에 교회를 다니다가 중도에 떠난 사람들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들 한다. 전도현장에서도 이런 이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날 때 무언가 기독교인들에게 상처를 받거나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특정한 걸림돌을 경험하고 떠났을 확률이 높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안티기독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전에 교회 다닌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지금이야말로 기독교 진리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데 초점을 둔 전도가 필요한 때임을 환기시켜주는 것 같다.


예수님은 단순히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셨다. 복음의 제시를 중시하는 기존의 전도방법들에서는 이 회개의 과정이 본의 아니게 약화된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일단 복음을 쭉 듣게 하고 결신케 한 후 양육과정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목회적 과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후유증도 생겼는데, 경우에 따라 문제를 깊이 파악하기도 전에 먼저 복음이 가진 답에 익숙해지거나 면역이 되어버리는 이들도 생겨난다고 본다. 


변증전도는 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의 문제, 곧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각자의 죄를 깊이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짓게 된 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도록 돕는다. 그런 다음 그 죄를 해결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답을 제시할 때 그제서야 답이 답답게 된다. 문제를 모르면 답이 귀한 줄도 모른다. 하나님이나 기독교 진리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오해나 걸림돌이 무엇인지 묻는 데서부터 시작해 거기에 답해주면서 결국 가장 중요한 죄의 문제와 구원의 답을 발견하도록 돕는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안내해줄 수 있다.


필자는 2013년 초부터 사영리 형태의 16쪽짜리 소책자인 <7문7답 전도지>를 만들어 한국교회에 공급해오면서 이 영역에서 부족하지만 의미 있는 도움을 제공하고자 노력해왔다. ‘기독교에 대해 가장 많이 묻는 질문 7가지’라는 부제를 가진 이 전도지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세계관의 큰 틀 위에 창조부터 선악과, 성경, 예수님의 유일성, 옛날사람들의 구원, 천국과 지옥, 기독교인의 윤리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상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흔하게 묻는 질문들에 대해 짧고 핵심적인 답과 성구를 소개했다. 안티기독교인들의 질문 공세로 전도의 문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 한국교회의 전도현장에 작지만 힘 있고 효과적인 소통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전도지에 실린 7가지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 


2.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선악과를 만들어 세상에 악과 고통, 재난과 죽음이 생기게 했나? 


3. 성경이 신화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아는가? 


4. 모든 종교는 결국 다 같은 것이 아닌가? 왜 기독교는 예수만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면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가? 


5. 예수밖에 구원의 길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가나? 


6.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는지 어떻게 아나? 


7. 기독교인들이 거룩하기는커녕 비난받고,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도 비리가 많은데 왜 그런가?


이러한 질문들은 비신자들이 평소 마음에 막연히 품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으로 표현하진 못하던 것들이다. 이 7가지 질문들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기독교 진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전도 대화에 참여하게 해준다. 본격적인 복음 제시 전에 대화의 말문을 트거나 접촉점을 만드는 사전 전도 차원에서 활용하면 특별히 더 큰 효과가 있다. 또한 평소 직접적으로 전도하기 어려웠던 가족이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전도지를 제작할 때 왜 지금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러한 변증적 접근의 전도지가 필요한지에 대해 소개했다. 필자가 추구하는 변증전도의 기본취지와 방법을 체계 있게 담아내기 위해 이 전도지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7가지로 정리했다. 변증전도를 실행하고자 할 때 좀 더 분명한 변증전도의 의의와 필요성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 아래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첫째, <7문7답 전도지>는 성경에 나오는 ‘변증’의 의미가 질문에 대한 '대답'(apologia)이라는 점에서 가장 성경적인 전도를 실천케 해주는 도구의 하나로 쓰임받을 수 있다. 변증전도의 주제 성구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된 변증전도훈련은 세상 사람들의 질문에 최대한 성경적인 대답을 많이 습득해두는 것이다. <7문7답 전도지>는 이 훈련을 자극하는 마중물로 전도자 자신이 진리를 확신하고 일상 속에서도 항상 대답을 준비해놓는 삶에 익숙해지도록 도와준다.


둘째, 포스트모던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접근이 담긴 전도지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개인이 가진 체계화된 지식을 권위 있게 전달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디지털 시대에는 자신만의 관심사를 검색창에 쳐 넣고 맞춤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7문7답 전도지>는 “기독교가 이런 것이니 받아들이라”고 말하기 전에 “당신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상대방의 입장으로 먼저 내려선다. 그 질문에 눈높이를 맞춰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대답을 시도한다. 나 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의 전도다.


셋째, 전해주기만 해도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풀고 마음을 열어주는 촉매제가 된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던지는 공격적인 질문들 배후에는 대체로 하나님이나 기독교, 기독교인들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깔려 있다. 먼저 지적 걸림돌들을 제거해주고 그 후 드러나는 상처받은 마음까지 치유해줄 수 있어야 온전한 전도다. 사람들은 보통 선입견으로 품게 된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의문들은 쉽게 답을 찾을 수 없고 성경에도 그 답은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7문7답 전도지>는 그 답이 성경에 분명히 담겨 있다는 핵심 단서들을 간단명료하게 알려준다. 그래서 더 깊은 탐색으로 이끄는 관문이 되며, 오해와 상처를 치유하는 데도 촉매제 역할을 한다.


넷째, 7문7답 안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요약되어 있다. 7문7답 안에는 변증전도에 필수적인 요소들이 각 단어에 담겨 있어 전도현장에서 어떤 질문을 만나든 무슨 말로 대답할지를 기억해내는 데 유용하다. 문제가 분명해야 답도 분명해진다. 질문이 유형별로 분류되면 답을 정리하기도 쉽다. 변증전도 세미나를 통해 7문7답의 핵심요소들을 익혀두면 전도현장에서 응용하기가 쉬워 전도에 담대해진다. 


다섯째, 기존 전도방식들의 강점은 살리고 약점은 보완해준다. 변증전도훈련의 주 교재이자 전도현장의 주된 도구로 쓰일 <7문7답 전도지>는 사영리나 브릿지, 전도폭발, 관계전도, 고구마전도 등 기존의 전도방식들과 잘 융합된다. 각각의 방식들이 가진 고유의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보완하는 보조도구로 활용하기에도 충돌이나 무리가 없다.


여섯째, 초신자나 명목상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양육 전도에 효과적이다. 초신자들이나 교회 안에 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청소년, 청년, 장년 교인들은 기독교 진리에 대해 가진 평소의 의문들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체로 답 찾기를 미루거나 포기한 채 수동적으로 교회 출석만 하다가 세상의 안티기독교 분위기에 휩쓸리면 미련 없이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이들에게 <7문7답 전도지>를 전해주면 기독교 진리에도 얼마든지 합리적인 대답이 존재하며 실제로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해답 찾기가 가능하다는 데 흥미를 갖게 된다. 새로운 대화와 소통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줄 수 있다. 


일곱째, 각 단체나 교회의 좀 더 심화한 전도 활동이나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활용할 수 있다. 변증전도는 과정을 중시하는 전도다. 성급하게 열매를 곧장 거두려 하기보다 말씀의 씨를 언제든 부지런히 뿌려놓고 그 다음다음 단계에서 다른 경로를 통해 추수되더라도 만족하는 전도다. <7문7답 전도지>로 전도의 문을 연 뒤 좀 더 심화한 내용의 오디오 CD를 주거나 책을 선물하거나 정기적인 교회 전도 모임에 초대하는 후속과정을 중시한다. 전도지 뒷면을 사용해 개 교회나 단체를 소개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안티기독교 현상을 넘어 


교회가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되기보다는 종교적 서비스 기관의 하나처럼 변질된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목회자들의 무분별한 교회성장주의가 이런 성향을 부추겨왔고 성도들에게는 기복적인 신앙 양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개인적인 신앙생활로만 사유화시키며 사회 공동체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기독교 선교에 얼마나 유익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이 돌아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은 특히 인터넷 문화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안티기독교 성향과 맞물리면서 기독교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는 그동안 인터넷상의 기독교 비판 분위기에 대해 거의 무대응과 외면, 무대책으로 일관해왔다. 결국 안티성 비판이 활개치는 형국을 빚어내는 데 일조한 셈이 되었는데, 지금이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기독교 진리 자체가 갖는 배타성 때문에 세상과의 소통을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패배주의일 뿐이다. 구원론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진리의 내용 자체는 특성상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진리를 전하는 태도에서는 대화적인 소통의 기술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비방하는 상대를 더 철저히 입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섣불리 이원론적인 태도로 후퇴하거나 방어적이고도 수구적인 자세를 보이려 하기보다는 반기독교 현상들에 대한 냉철한 신학적 분석과 진단을 통해 모든 한국교회가 공유해나갈 수 있는 합리적인 기독교변증 차원의 대응논리들을 개발해나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윤리성에 대해 어두운 부분들만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선동하는 분위기에 대해서도 적절한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변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리나 교리에 대한 변증 못지않게 삶의 타당성에 대한 변증이 필요한 이유는 기독교 진리가 참이라면 그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도 진리답고 진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변증은 삶에서 완성된다는 영적 긴장감이 필요하다. 그런 만큼 궁극적으로 우리 시대의 안티기독교 현상을 해소해나가기 위한 실마리는 참된 회심을 경험케 하는 참된 기독교의 회복에 있어야 한다.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판 역시 이 부분을 새롭게 재고하고 갱신하라는 섭리적인 도전이라고 여기는 안목도 필요해 보인다. 


인터넷상의 기독교 비판자들은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만 보려는 경향이 뚜렷한데, 이는 그들 입장에선 정당하다. 기독교는 종교의 하나로만 본다 해도 손색이 없어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연약함이나 비윤리성 때문에 기독교 진리 자체의 진정성이 의심받게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 진리 자체가 가진 배타적인 특성과 기독교인이 삶에서 보여주는 배타적이고도 독선적인 태도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삶의 태도에서는 합리적이면서도 부드러운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기독교 진리의 배타성 역시 합리적이고도 합당한 이유를 가진다는 메시지로 전달될 것이다.


강압적인 노방전도에 대한 거부감, 이단들의 발호로 인한 오해와 미혹, 목회자들의 외면으로 인한 종말론의 음성화 문제 등은 변증적 전도 활성화가 이뤄지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무자격 목회자 양산에 따른 교회 지도자들의 비윤리성 문제나 인정받는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목회자 권위주의로 인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좀더 면밀하게 문제의 근원을 돌아보고 미리 예방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실 아직까지도 인터넷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안티기독교성 댓글들에 대해 기독교를 적극 옹호하는 반박성 글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댓글에 대한 답글들도 다 동일한 방향의 비난 일색이다. 실제적인 면에서는 기독교와 관련한 기사가 인터넷에 오를 경우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중재역할을 할 만한 사이버상의 변증전도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오해나 선입견에 따른 터무니없는 매도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그대로 두면 기정사실화되고 교회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져 중립지대나 접경지대에 있는, 주된 인터넷세대인 교회 내 젊은층을 더 많이 잃어버릴 수도 있다.


요즘은 이미지 시대인데 지금 기독교 이미지는 말도 못하게 나빠져 있다. 되돌리려면 이론적으로는 변증전도도 필요하지만 실천적인 삶의 노력도 더 많이 필요하다. 복음전도에서 그 전달자인 기독교인의 증인 된 삶은 그 커뮤니케이션을 생명력 있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하나님 신앙의 진정성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통로가 기독교인들의 윤리적인 삶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삶의 열매가 기독교 진리의 진정성까지도 좌우한다. 이는 곧 기독교 진리와 삶을 한데 아우르는 균형 잡힌 변증전도 사역이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을 다시 초대하기 위해 참된 회심과 복음의 회복을 사역 현장에서 더욱더 강조해야 할 목회자들의 새로운 시대적 사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안환균 목사/ 그말씀교회 담임. 변증전도연구소 소장. '교회성장'(교회성장연구소) 2017년 2월호 특집 기사에서



출처 : 변증전도연구소
글쓴이 : Stephan 원글보기
메모 : 변증전도 연구소 안환균 소장의 특집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