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기독교의 목표와 노선

'개독박멸'은 신념이 되어야.... 한겨레 토론방에서 옮겨온 자료

시골마을 주민 2011. 5. 28. 20:57

아래의 자료는 'Nosferatu '라는 신학대를 나온 안티기독의 글을 한토마에 옮겨 온 것을

다시 옮겨 온 것입니다.

그는 어느 집단의 경직된 교조주의에 의해서가 아닌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기독교 박멸을

할 것을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유일신 교리어서 유연해질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개독박멸'을 주장하는 안티 역시 교조주의화되어 있고 경직화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반기련의 목표에서가 아닌 개인의 의식 속에 '개독발멸'의 신념을 내면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독박멸'은 안티기독교의 경직화된 교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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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티기독교운동의 경직된 교조주의

이 름 Nosferatu  조 회 96 [스크랩] [프린트]


오늘날 안티기독교운동이 부딛히는 가장 쓰라린 반론 중 하나가,

경직화된 교조주의 기독교를 반대하는 안티의 목소리마저 하나의 교조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이다.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반론에 부딛혔을 때 딱히 할 말이 없다. 내 눈에도 그것은 사실로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고,

내 양심이 엄연히 살아있는 한 실제로 그런 것을 아니라고 말 할 자신이 없음으로 하여 그렇다. 그 하나의 교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토록 부르짖고, 술잔을 부딛힐 때마다 다짐하는 [개독박멸]이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유연함을 잃어버린 어떤 것은, 그 경직된 단단함으로 인해 무척이나 강해 보여도, 사실은 가장 깨어지기 쉬운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무엇이 됐든 사람이 내는 목소리는, 그것을 내는 사람 장본인이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어떤 구석에서든 약점을 하나 이상씩 품게 마련이고,

그 약점에 공격을 받게 되는 경우 유연함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그 자체의 경직성에 못이겨 균열을 일으키다 결국 깨어지기 마련이다.

 

또한 그러한 사실은, 경직된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그토록 집요하게 공격해 온 우리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만큼 충분하게 경험해 오기도 했다. 왜냐하면, [박멸]을 외칠 수 있다는 것, 또한 그러한 외침에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박멸이라는 외침의 대상이 되어 온 무언가가 [유연함을 잃어버려 개선의 여지를 상실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의 개혁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대해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물론 기독교의 개혁과 개선의 가능성이란,
기독교를 기독교이게 하는 핵심적인 부분에서 유연성을 띄어야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은, 그 핵심적인 부분, 기독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그 부분에서 유연성을 띄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정체성identity과 특이성uniqueness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까닭이다.

 

누차 이야기해 온 바지만, 인간의 원죄성(비단 아담과 하와의 사과서리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다)과 그것을 속죄하기 위한 절대유일하며 유일회한 길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부분에서 작금에 존재해왔고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과의 차별성과 유일성,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어떠한 사상을 받아들여 어떻게 해석해본다 한들 전술한 요소들에 대해 과연 유연성을 부여할 수 있겠느냐 하는 회의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호교론적 입장에서 가장 유연성이 요구되는 부분에
가장 경직될 수 밖에 없는 절대군주를 앉혀놓은 것이다.

그 경직이 낳은 결과가 바로 [개독박멸]이다. 그 경직된 핵심요소가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폐해들이, 핵심요소의 개선 없이는 해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인 핵심요소를 개선하고 수정할 여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한 마디로 개선이 불가능하니 치워버리자는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치워버리자는 이야기
자체도 치워야할 어떤 것 못지 않게 경직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제기조차 못 견뎌 하는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쩌면 이런 질문이다. [기독교가, 그 모든 문제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핵심요소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실질적인 피해를 끼치는 일 없이 그저 조용히 자기네들의 신앙생활만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그래도 무조건 박멸을 외칠 것인가?]라는. 이 질문 앞에서
내 개인적인 입장은,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기독교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것 이다.

 

그네들이 뭘 어떻게 믿고있건간에, 그것이 나의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내가 굳이 그걸 믿어라 마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이 내게 굳이 그걸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데, 나 역시 그걸 믿지 말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설령 그 교리가 내 맘에 들지 않고, 그 경전이 말도 안돼 보인다 한들 그걸 굳이 믿고 싶어하는 그네들이야
믿든 말든 내게 믿으라 하지 않고, 그 교리와 경전을 이유로 하여 내 믿지 않음이나 다르게 믿음을 트집잡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네들이 뭘 믿든 무슨 상관인가.

 

그런 황당하다 못해 허접스럽기까지 한 것을 믿으며
그 앞에 자기 지갑을 열어젖힌다 하더라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그저 마음의 평안을 사는 값이려니 정도로 넘어가면 그만인 것을.
개독박멸이라는 구호는, 그렇게 생각없이 외칠 수 있는 재미있고 가벼운 것 만은 아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외치고들 있으니까 덩달아 따라가야만 할 무엇도 아니다. 윗 단락에서 이야기한 저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도 같은 상황이 어째서 불가능한 것인지, 그렇다고 그 개독박멸이라는 것 자체도 과연 실현될 수는 있는 이야기인지, 그것을 고민하는 나는 도대체 왜 개독박멸을 원하고 있으며 어째서 그것에 골치아파 하는지,
그것이 내 삶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한 끝에 나름대로 그 방향을 확실히 잡고 나서야 비로소 내놓을 수 있는, 반기련이라는 단체의 모토가 결코 아닌 바로 자기자신의 확고한 의지표명이다.

개독박멸은 바로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나의 신념]이 되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교조주의라는 비판은, 개개인의 확고한 신념에 대해 가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개개인의 확고한 신념이 없이 단체의 슬로건에 무조건 묻어가려 할 때, 혹은 어떤 단체가 내세우는 실체없는 이데올로기에 개개인의 신념을 함몰시키려 할 때에서야 비로소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서운 위력으로 휘몰아쳐 오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자. 도대체 개독박멸이라는 말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나는 그것을 어째서 외치고 있는 것인가고.

나는 도대체 왜 기독교가 박멸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가고.
그 자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을 솔직하게 한 번 들여다 보자. 어떤 답변이 됐든 그것으로 확고하며 더 이상의 반론의 여지가 없는가?

아니라면,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은가?

더 이상 스스로나 다른 사람에게서나 반론의 여지가 없다면 좋다.

술잔을 부딛히든 무엇을 하시든 당당히 개독박멸을 외치시라.

교조주의니 뭐니 하는 개소리로 달려드는 이들에게 당당히 닥치라고 일갈하시라.

개독박멸은 누구의 사주나 세뇌의 결과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당당하고 굳센 의지이며 거기엔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분명히 하시라.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생각하고 또 연구하여 기독교 정화와 개혁의 여지가 과연 있는지, 있다면 어떤 것이 될 것인지, 기독교의 이런 모습에 나는 반대하지 않겠다든지 어떤 의견이든 자유로이 전개하시라.

반기련에서 아무리 개독박멸을 주장한다 한들, 그것에 굴복하거나 자신의 소중한 목소리를 그것에 그냥 스스로 생매장해 버리지 마시라.

그런 의견에 대해 주위에서 니 말이 틀렸네 맞았네 토달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 이에게 개독박멸의 목소리에 묻혀버릴 것을 강요할 이유도 없다.

그러한 숙고와 고민끝에, 결국 스스로 도달할 곳은
[박멸만이 대안이다]밖에 없음을 알게 되실터이니.


개독박멸의 주장은,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강경하게 주장할수록 약점이 많아진다.

오히려 유연하고 여유있게 가져갈수록 더욱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희한한 특성을 보인다. 입장이 극단에 가까울수록 유연하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넓은 폭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개독박멸이라는 말에 스스로 목을 매달 필요도 없고 그것을 고수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그것에 목소리를 맞추라고 강요할 이유도 없다.

답이라곤 그것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그 입장이 이미 스스로 정립되어 있는가, 아직 아닌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반기련의 모토 [개독박멸]은 없다.

오로지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당당히 외치는 [개독박멸]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우리주 이슬 그라스님의 얼큰하신 은혜와
안주님의 든든하신 사랑과
국물님의 시원하시고 풀어주시는 역사가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간과 위장 위에
지금부터 내일 아침까지 함께하실지어다


작성시간 : 2006-04-02 22: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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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부대장

:: 경직된 단단함으로 인해 무척이나 강해 보여도, 사실은 가장 깨어지기 쉬운 것.
- 이 말에 동감합니다.
업무상의 시행착오 원인이 너무 완벽하게 처리하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 요즘 종종 합니다.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 고지가 바로 저기 보입니다.
한 고개 넘어가면 또 다른 고개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인간 삶의 한 축인데. (동문서답하는 건가? 불교선전하는 건가?)

그것에 목소리를 맞추라고 강요할 이유도 없다.
- 무슨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 같군요.(짐작은 합니다) 06-04-02 23:22
211.♡.196.150

도무지

안티들이 기독교 박멸을 주장한다고 해서, 얼핏 들으면 배타와 독선 그리고
강성이 떠올라 기독교와 닮은 꼴로 변해간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단어가 주는 이미지 일뿐 사실과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아무리 유연을 가장한다 해도 그들은 유일신을 믿는 이상 배타성과는
동침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노스님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리고 안티들은 이러한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지만 논리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간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사고의 유연성입니다.
흔히 말하는 기독교인다운 기독교인들은 일단 내버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기독교 박멸이란 모토에 끼워 맞추어
그들까지 도매급으로 넘기지 말자는 이야기겠지요. 그들의 삶에 태도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인간에 대한 인정이지 그가 믿는 신앙의 대상까지는 아닙니다.
여기서 유연성을 발휘하자는 것이지요.

안티란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 집단입니다. 우리는 숫자가 그들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에
무조건 기독교 박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왜 기독교 박멸을 해야하는 지 누가 가르쳐 주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고 체득해야 합니다
. 물론 반기련 사이트도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열린 장소로
끊임없이 운영자나 회원들의 열린 공간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안티를 할 수 있는 것이고
기독교 박멸을 하는데에 일조 하는 것이겠죠. 06-04-02 23:32
218.♡.152.32



도무지

::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멀리 보고 갈 수 있겠지요. 06-04-02 23:40
218.♡.152.32

 
 
2006-04-03 오전 8:03:41 from 211.XXX.15.71   • 운영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