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기독의 활동 중심은 반기련이었다.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다. 쟁쟁한 안티들이 포진하여 있는 곳이 반기련이었다.
2003년 클안기를 모체로 시민운동을 표방하여 기독교 박멸을 목표로 반기련이 설립되었다.
반기련은 오프활동, 문서출판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반기련은 쟁쟁한 필력을 가진 안티들이 집결한 명실상부한 안티기독의 중심이었다.
2005년에는 사무실을 열고 상근자를 배치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는 데 사무실을 연지 반년도 안되어 분규가 일어났다.
'개독'을 향해 퍼붓던 말의 향연이 반기련 회원들간에 오고 갔다.
최고의 안티인 이드는 반기련을 이탈하여 광복군, 러셀, 문비 등 몇몇이 종비련을 창립하였다.
이때부터 반기련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뒤에도 서로의 갈등 때문에 이탈이 이어졌다.
결과 반기련은 안티기독의 중심역할을 하지 못했다.
안티들에게는 호재인 조지아대의 조승희 사건이 터질 때도 반기련은 지나치게 신중하였고 행동하지 못했다.
아프칸 사태때 다음 아고라와 디시 종갤에서는 아프칸 인질들과 기독교를 비난하는 악플이 사이버 공간을 채울 때도 반기련은 상대적으로 조용하였다.
이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포털과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반기련의 차이도 있지만 이미 반기련이 안티의 구심점 역할을 상실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반기련은 안티의 중심 역할을 하기 위한 몸부림을 친다.
이것이 바이블 19금 청원 운동이다.
성경을 비방하는 내용을 취지문에 넣고 성경을 미성년자 금서로 하자고 각 포탈에 홍보를 하고 종교와 관련이 없는 환경단체 등의 사이트에서까지 가서 홍보를 하고
농학박사인 사천왕은 비록 사이버 공간에서지만 불교 사찰마다 누비며 동참을 호소했지만 1년반이 넘은 이때까지 회원수의 과반에도 못미치는 8000명에도 미달되는 수의 서명밖에 받지를 받지 못했다.
위안이 있다면 반기련 이찬경회장이 기독교측과 2007년 11월에 벌린 토론회일 것이다.
기독교계가 반기련을 안티기독의 중심으로 인정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티활동의 무게중심이 반기련을 이탈한 것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아프칸 사태를 계기로 안티활동의 중심은 다음 아고라가 되었다.
안티들은 기독교인의 길거리 전도를 맹비난하는 데 자신들은 종토방이 아닌 경제, 사회, 정치 등 다른 곳에서 열을 올리며 안티기독을 알리고 있다.
아프칸 사태 이후 이슈가 없어서 소강상태를 보이던 안티들이 이번 조두순 사건으로 다시 물을 만났다.
조두순을 목사라고 조작하는 것을 지나 조두순이 목회하는 교인까지 등장하는(?) 대단한 창의력을 발휘하며 조두순 사건을 기독교 까기의 계기로 활용한 안티들의 활동 중심은 반기련이 아닌 다음 아고라 등 포털이었다.
반기련의 경우 회원이 드러나 있고 거짓을 바탕으로 활동할 경우 나중에 조직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몸을 사리는 반면 포털에서 활동하는 안티들은 익명성이 보장되고 보호에 신경써야 할 조직이 없기 때문에 마음놓고 사실을 왜곡하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반기련은 이제 안티기독 홛동의 구심점 역할을 상실하였다.
다만 중국의 전국시대에 주왕조처럼 상징적인 중심성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안티활동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각자가 중구난방으로 목소리를 낼 것이고, 조두순사건처럼 허위 조작 및 사실왜곡의 방법으로 기독교를 폄하시키기 위한 활동은 장기적으로 안티집단 자체를 거짓을 만드는 집단으로 정의하게 만들어 안티의 위상을 실추시키게 될 것이다.
이미 활동 중심에서 벗어난 반기련은 안티들의 개독박멸을 위한 열열활동 때문에 안티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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