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근래에 이르기까지는 소위 '안티 기독교'라는 것에 가담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활동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기독교도들의 욕설과 비방 속에서 '안티 기독교'라는 딱지가 붙은 지금에 와서 제가 그것을 부인하는 것도 우습고 해서 그냥 '안티 기독교'가 될까 합니다.
저의 '안티 기독교' 혹은 '안티' 일반에 대한 생각은 저 나름대로의 생각이며, 제가 행하고자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1. '안티'란 무엇인가?
'안티'란 말 그대로 무엇인가에 반대한다는 뜻의 영어 접두사를 한글로 쓴 것입니다. 따라서 '안티 기독교'란 기독교에 반대하는 것, 혹은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2. '안티'의 유래와 기독교의 대응
임현수님은 '안티'의 유래를 환각에 빠지기 전의 바울... 아마도 사울이었죠?
아무튼 그에게서 찾으시는데,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도들은 이미 회개해서 기독교도가 된 그조차도 폭행하고 죽이려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기독교도에게서 찾을 수 있는 독선과 아집, 그리고 무자비한 잔혹성이 이미 초기 기독교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처럼 안티 기독교 운동은, 설령 안티에서 프로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내놓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처럼, 초기부터 기독교도들의 잔혹한 보복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전향적인 시대가 잠시 도래합니다.
소위 말하는 교부들의 시대로써, 이들을 부르는 다른 말은 '변론자(변증자, apologist)'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apology라는 말은 '사과' 혹은 '변명'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그런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이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소위 안티 기독교의 공격에 대해 바울에게 했던 것과 같은 무자비하고 잔혹한 폭력도 아니고, 오늘날 기독교가 보이는 힘에 의한 탄압과 욕설, 비방과 저주, 인신공격도 아닌 논리에 의한 방어를 시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데에는 물론 기독교의 호전적 속성(당시 황제는 예수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이 큰 힘이 된 것이지만, 여러 유사 종교들 속에서도 유독 기독교가 전교에 성공하고 로마 전역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 교부들, '변론자'들의 힘이 컸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안티'의 현재와 기독교의 현황
현재의 '안티 기독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성서의 모순과 과학책으로써의 성서를 배격하는 논리적인 공격을 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지극히 감정적인 비난을 퍼붓는 쪽일 것입니다. (이 구분의 기준은 이성과 논리 대 감성입니다.
당연히, 다른 기준을 세워 나누는 것도 가능할 것이지만, 일단은 이 기준이면 족할 것 같습니다.)
그 중 첫번째 공격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반응은 여러가지입니다. 어느 것에 대한 공격인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데, 성서의 모순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응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거나 감정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을 해대는 것이 주가 되고 있으며, 성서가 과학을 담고 있다는 개신교의 주장을 공격한 것에 대해서는 일부는 '중학생이면 다 찾을 수 있는 자료'를 가져다가 반론을 펴려 시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초등학문' 수준의 과학 상식으로도 쉽게 거짓임을 알 수 있는 억지 주장을 사람만 바꿔서 되풀이하곤 합니다.
물론, 성서의 내용이 과학적이라는 주장도 역시 성서의 모순을 지적하는 반응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만, 그것을 피하기 위해 근래에 와서는 성서의 내용과의 접목은 암묵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기존 과학의 비난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 개신교도들은 '안티 과학' 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임현수님이 비난하고 싶은 '안티' 운동은 '안티 기독교'에 국한된 것으로 보이므로 일단 그 이야기는 접도록 하고, 성서의 모순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응만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기독교도(그리고 일부 '무교'임을 주장하면서도 기독교인은 모두 성자라는 기묘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포함하여)들은 '논리에 미혹되지 말라'는 구호아래 비논리와 몰이성을 주입하려 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으실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합니다. 그들은 이제 초기 교부들이 지녔던 열정과 애정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2000여년간 입에서 입으로 계승되어온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녹음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정당화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수없이 난립된 신학교들을 통해 양산되는 성직자들의 말 속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또한, '안티 기독교'의 방향이 두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두 번째 부류(감정적 비난)에 집중, 첫 번째 부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반응도 있습니다. 이들은 '안티 기독교' 운동이 '선량하고 열심히 사는 대다수의(혹은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첫 번째 부류의 '안티 기독교' 운동은 그 존재조차 부정하고 싶은 나머지(혹은 그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만) 성서와 기독교 자체에는 아무런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문제에 대한 비난이므로 역시 두 번째 부류라고 생각해 버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죠. 여하튼 그들은 '안티 안티 기독교'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고,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을 감정적으로 자극함으로써 성서의 모순이 아닌 감정적 싸움을 벌이도록 유도하기도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안티 기독교' 운동은 이성적 공격과 감성적 공격이 있는데, 현대 기독교는 둘 다 감성적인 싸움으로 변질시키며, 역시 감성적인 돌파구를 찾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초기 기독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성적인 공격과 이성적인 방어의 형태로 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렇게 되는 것이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이성적/논리적 방어가 무의미한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초기 교부들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애정과 헌신을 송두리채 부인하는 것이며 기독교를 여타 미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4. '안티'의 대안 부재
'안티 기독교'에 대한 여러 비난 중에서 '대안이 없다'는 비난은 많은 분들이 수긍을 하실 것입니다. 저역시 '안티 기독교' 운동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안티' 운동에 '대안'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 중의 하나로써 그러한 비난에 어느 정도는 동감을 합니다.
하지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의 종교가 절대선이며 다른 종교는 무조건 절대악이고, 자신들의 경전인 성서는 절대 진리이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것은 그 어떠한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을 하더라도 악한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독선과 아집을 비판하고, 짖밟힌 종교의 자유를 회복하고자 하는 희망에서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단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를 버린 후 선택하여야 할 '대안'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자가당착적인 모순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믿으십시오.'라고 한다면, 단지 '기독교'라는 도그마를 '이슬람교'로 대치시킨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이 독선과 아집을 부리고, 다른 사람의 종교의 자유에 간섭한다는 점에서는 나아진 점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티 기독교' 운동은 '기독교'라고 해서 모순과 허점이 없는 것이 아님을 보이는 데에서 끝나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 모순과 허점을 본 후에, 교부들처럼 그것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를 모색하고 더욱 신심에 빠져든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으로 존중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로서도 제 2의 교부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제 2의 전성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모순과 허점을 본 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대안도 없이 '안티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게 된다면... 기독교로서는 더욱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말이 조금 샜습니다만, '안티 기독교'의 대안 부재에 대한 이해는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즉,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 '안티 기독교' 운동에서 제기하는 성서의 모순을 덮어 주는 것이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도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5. '안티'는 세상을 망치는가?
더 할 말이 많습니다만, 일단은 이 질문을 끝으로 글을 마치려 합니다.
요즘 태조 왕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중 하나는, 과연 '안티 왕건'인 종간이 없었더라도 '태조 왕건'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안티 기독교' 운동을 맞아 교부들이 더욱 이론과 체계를 공고히 하는 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세계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런 노력을 경주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도 로마 시대의 다른 많은 종교들처럼 로마 시대를 끝으로 종언을 고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초기 기독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밀교적 의식에만 빠져 그러한 노력을 소홀히 했던 미트라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안티' 운동을 미끼로 돈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수준 미달의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일부'일 것이며, 기존 교회의 승인을 받는 목사의 경우와는 천양지차로 자기 스스로 '안티'가 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승인을 받은 목사와 같은 성직자, 혹은 장로니 뭐니 하는 사람들에 대해 교회가 책임을 져야함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런 '일부' 그릇된 '안티' 운동의 책임을 모든 '안티'가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다른 '안티'들이 '안티 자격증'이라도 발급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인 결론은 쉽게 내리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내려드리면 오히려 실례인 듯 해서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기겠습니다. 다만, 요 몇 주 사이 기독교도 여러분들의 욕설과 비방, 그리고 저주와 악담이 저를 진정한 '안티 기독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점에서 기독교도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와 유감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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