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시대의 세례
모든 고정된 진리와 지식이 부정되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 거대한 흐름은 모든 정보가 모든 개인에게 자유로이 개방되는 시대의 막을 열었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 그리고 거대한 정보 공유 커뮤니티-이 두 가지의 조합이 우리에게 “안티 문화”라는 새로운 문화의 장을 여는 하나의 키가 되었다.
20세기 말의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세대는 아직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21세기라는 말이 얼마나 우리에게 기대와 흥분으로 다가왔는지를.
열린 미래와 첨단 과학으로 인한 인간 해방과 지식 사회의 새로운 화두에 우리는 얼마나 흥분하였던가!
경제는 엉망이고 나라 안이 좌, 우익으로 갈가리 갈려 하루가 멀다 하고 경제 전쟁, 이념전쟁으로 해가 저무는 이러한 미래를 기대하였던 분들은 아마 아니 계시리라.
하지만 어찌 하오리까. 이것이 현실인 것을요.
어쨌든 신시대는 개막되었고, 그것이 옳든, 그르든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흔히 칭해지는 왕의 이야기를 아마 알고 계실 것이다.
이 신화는 우리 인간의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얼마나 거대한 욕구인지를 말해준다.
사실 우리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이웃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 우리는 그 사실을 얼마나 다른 이들에게 말하고 싶던가?
남의 뒷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경멸 받기 일쑤지만 우리가 우리 내에 이러한 욕구가 숨어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흔히 비밀은 “너는 내가 믿는 친구니까 너에게만 말할게” 라는 말과 같이 조심스레 퍼진다.
배갯머리 송사는 그래서 더더욱 무서운 것이다.
안티문화의 본질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그것이 바로 안티 문화의 핵심이다.
통신 수단의 발달이 정점에 이르른 이 시대-나만이 알고, 나만이 생각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가 바로 안티문화를 만들어내었다.
어려운 사상이니 시대니 하는 말을 하기 앞서서 간단한 예를 하나만 생각해 보자.
안티 문화로 가장 널리 퍼진 것이 바로 특정 가수의 안티들이다.
그들은 왜 생겨났는가?
단순히 잘 생기고, 돈 잘 벌고, 유명한 이들이 질투가 나서였는가?
실제로 이러한 의도로 생겨난 사이트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그 질투가 까맣게 타서 재가 되면 없어지는 운동들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는 운동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표절하지 않은 순수 창작곡, 그리고 비음악인에 대해 보다 더 높은 가창력, 공부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보고 싶은 열망뿐이다.
이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립싱크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인식이 되기에 이르렀고, 표절곡에 대해 끊임없이 감시하는 시스템이 도입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제 비교적 과거보다는 좀 더 라이브의 비중이 늘어나고 표절에 대해 다소 강한 제재가 생기는 등 우리 대중가요계의 지도가 바뀌고 있다.
단지 표절과 립싱크에 반대하는 이들이 모여 이루어낸 쾌거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안티 문화를 저질스러운 정서적 만족감을 위해 노력하는 저급한 문화의 단면으로 보아서는 안 될 때가 온 것이다.
안티 문화는 인간의 말하고자 하는 원천적 욕구의 충족이며 미래로 도약하기 위한 정체성의 확인이다. 정보화 시대의 세례이며 쌍방향 다채널 미디어 시대의 산물이다.
Age of New Type Media-축복인가, 저주인가
성적 정체성 문제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모 가수는 자신의 음악적 이슈보다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모욕을 가한 사람들로 곤욕을 치른바 있다.
또, 안티가 많기로 가장 유명한 모 연예인은 음반 발매 시 마다 겪는 안티들의 공격으로 제대로 활동도 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토로한 바 있다.
이들에 대한 정보의 사실 유무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들은 인터넷 상의 가상공간에 의한 피해를 본 이들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이 없을 것이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것이 진리일 것인가.
우리는 인터넷 상의 자유로운 활동 영역을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부작용을 먼저 보게 된다.
정말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 3의 물결의 저자는 1999년 서울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정보화가 긍정적인 현상만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이 먼저일 것”을 말한 바 있다.
정보화가 진행되면서 생기는 정보 격차,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생기는 인신 모독, 인터넷 쇼핑몰에서 생기는 각종 분쟁들을 보면서 이 말에 공감한다.
열 포졸이 도둑 한 명 막지 못한다 했던가.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대서야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인간일 것인가!
우리 인류가 말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뜻하지도 않던 바, 우리는 사회의 발전보다 기술의 발전에서 이 힘든 권리를 얻어내었다.
이것이 축복인가 저주인가? 오직 우리 자신들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은 진리가 가진 힘이 없다.
예쁘고 몸매 또한 잘 빠진 여자를 두고 “야 이, 돼지야!”라고 말해 보라.
누구도 충격 받지 않을 것이다.
아마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고 웃을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이 말을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한테 말해보라.
그 여자를 울리던지, 아니면 얻어맞든지 둘 중 하나이리라.
아주 조악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거짓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사람을 상처 입히는 힘이 없다.
오직 진실만이 그러할 수 있다.
그래서 소위 진리는 양날의 검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진리는 칼을 든 사람이건 그 칼에 겨누어진 사람이건 모두를 상처 입히기 때문이다.
진리가 나를 상처입힘을 안다면 아는 왜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믿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렇게 소망한다 말하면 너무한 것일까?
그러므로 명예 훼손은 악의적으로 특정인에 대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사실을 유포했을 때도 적용되지만 사실에 근거한 정보를 유포했을 때에도 적용된다.
진리는 사람을 상처 입히는 힘이 거짓보다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인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우리가 보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갈등은 거짓보다도 사실이 드러남으로 인해 생기는 갈등을 주로 다룬다.
거짓은 증거를 모아 부정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진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진리가 주는 상처는 깊고 크다.
안티-그 진실한 태도
안티는 탐구하는 자이다.
그리고 용기 있는 자이다.
누구도 귀찮아서, 혹은 두려워서 고개를 끄덕여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아주 힘 들여서 말한다.
“그건 아니다.”라고.
남들이 그렇게 말한다.
쉽게 세상을 살라고.
너 자신이 이런 공부 하지 않으면 너는 너의 인생을 더 풍족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숨이 목에 찰 만큼 힘들지만, 힘겹게 고개를 젓는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타협과 화해를 위해 내민 손을 잡지 아니하겠노라고.
거짓에 침묵하지 아니하겠노라고.
톨스토이의 인생관처럼,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우물에 매달려, 나를 잡아 먹으려는 사자를 등지고, 끊어지기 직전의 넝쿨을 부여잡고 있다 해도, 단 한 방울의 꿀, 그 진리의 맛에 탐닉하는 것이 나의 인생이노라고.
그 넝쿨에 맺힌 꿀을 즐기는 것이 바로 인간이노라고.
나는 단언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No"를 외친다.
나는 비록 진실을 알지는 못 할망정, 진실한 인생을 살고 싶으므로.
나는 거대한 종교 권력에 맞서 그 맹랑한 거짓에 냉소한다.
영웅주의에 물든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 칭하여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내가 나이고 싶어 하는데, 다른 이의 비평에 눈이 어두울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은 내가 지성과 양심을 사랑함은 존중하라.
나는 힘겹게 사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이유 또한 충분하다.
나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는 자가 아니다.
진실한 삶을 살고 싶어 노력하는 중 어쩌다 반대하게 되었을 뿐인 평범한 소시민의 하나이다.
기독교를 반대하며 나는 이러한 생각을 많이 했다.
평범한 소시민 하나를 투사로 만드는 것은 정말 잠시구나 라고.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구보다 잘난 이도 아니요, 현명한 이도 아니요, 출세한 이도 아니다.
번화가에서 돌 던지면 얻어맞을, 그런 평범한 장삼이사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장삼이사를 투사로 만든 이가 누구이던가! 이 말라붙은 비천한 현대인의 가슴에 불을 붙인 이들이 누구이던가?
술 권하는 사회-답답하고 갑갑하여 술을 마시고 잊을 수밖에 없는 천박한 종교 지도에 오늘도 나는 돌을 던진다.
얼어붙어 파문조차 일지 않는 썩은 기독교를 보고 다시 술을 마시고 잊을 수밖에.
하지만 이 술이 깨면 다시 나는 돌을 던지리라.
파문이 일지 않으면 깨어 주리라.
내가 그리 하리라.
다시는 “남이 알아서 하겠지”라며 방관하지 않으리라.
거짓에 침묵하지 않으리라.
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안티이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살아 왔노라고.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자랑스레 그리 말하리라.
말할 수 있는 지성은 아름답고 들을 수 있는 사회는 깨끗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