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된 사연

내가 기독교 안티였던 이유(옮겨 온 글)

시골마을 주민 2013. 7. 28. 11:02

아래는 '빗자루'라는 닉을 쓰는 분이 자신이 기독교 안티인 이유를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아래 게시글의 필자는 기독교의 부정적 현상을 비판하다가 안티가 된 대부분의 경우와는 달리 상당히 논리적으로 자신이 기독교 안티가 된 이유를 기독교의 본질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유목 민족에서 태동했기 때문에 유목민적 남성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으며 배타성이 강하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자신이 관찰한 기독교의 교리적 특성을 불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아래의 게시글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거부감으로 안티가 된 것을 서술한 것으로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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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 안티로써 대학교 1학년동안 반기련 같은데 가서 기독교의 깔것을 모으고 공부했다. 사실 기독교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해할려는 의도 일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1. 예수천국 불신지옥

유목생활은 대개 가족단위로 많은 가축군을 관리하기 때문에, 남자가 가족의 중심이 되어 가부장적(家父長的) 성격이 강한 대가족사회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고 여자의 정조는 매우 엄격하였다. 그들은 하늘을 숭배하고, 하늘을 유일신(唯一神)으로 보는 일이 많아, 인격신적(人格神的) 요소는 희박하며, 우상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인격화한 신은 남성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터넷 긁음_-

 

기독교는 유목민족이라서 남성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인터넷에서 밝혔다. 남성적 성격이란 이와 같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의하면 남성적 사랑은 조건적 사랑이라고 하고 여성은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모든것을 이어받을 뛰어난 사람을 바라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에 반면 여성은 무조건적 사랑으로 가르친다. 여자는 애를 낳으면 그 애가 뛰어나든 말든 무조건적인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조건적 사랑은 인정을 필요로 하는대에서 잔인한거 같지만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발전을 위해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자기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고 무조건적 사랑은 심리적 안정을 주어 발전을 위한 동기가 되므로 조건적 사랑이 그리 부정적 뉘앙스로 쓰이지만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유목민족에서 나온 기독교는 남성적 성격인 조건적 사랑을 하는 것이고 자신을 믿는 조건이 있을때 사랑을 내려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에 의해서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 하나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것 같다. 따라 남성중심의 신을 설정함으로 인해 자신을 믿어야 구원을 주는 조건적 사랑을 하게 된 것이라 생각이 된다.

 

또한 착하게 살았는데 지옥을 왜 가야 하는가? 에 의문에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성인이든 악인이든 지푸라기 인형 대하듯이 한다.라고 써있다. 선하다고 구원받고 악하다고 벌하는게 아니라는 시점이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러한 식으로 하늘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고정된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착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기독교에서만 들어나는 셈은 아닌 셈이다. 기독교에 나타나는 것으로는 옹기장이 비유가 있다. 옹기장이는 자신의 작품이 맘에 들지 않으면 깨뜨려 버릴 수 있고 깨진 옹기는 옹기장이에게 항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착하든 못되든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건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 착하다고 구원을 받을수 없다면 구원은 신으로부터 받을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착하여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게 완전 억지는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착하여도 그 자체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신에게서 구원을 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반대되는 말로는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가고 하나님을 만나면 천국을 간다는 것은 비유와 상징으로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삶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을 안 만나면 내 인생은 불행하다. 즉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위안받고 삶의 활력소를 받아 천국이라는 것이고 만나지 않음은 나에게 지옥이라는 식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상징과 비유에 불과하다는 논점도 있다.

 

2. 기독교의 성공지향적인 욕구

기독교는 이기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신에게 구걸한다. 남을 위한 이타적인 욕망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을 바라는 게 권장된다는게 한없이 착해야 하는 종교가 이기심을 조장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근데 그 이유는 이런 거 같다.

 

불교는 긴장을 이완하는 종교다. 몸에서 힘을 빼는 종교다. 무소유에 의하면 스님은 난초를 키우다가 남에게 줌으로써 행복을 느꼈다고 했다. 난초라는 건 예민한 식물로 긴장해서 계속 돌봐줘야 키울수 있는 것인데 긴장을 푸는 스님이 난초를 돌보았더니 수행에 방해가 되었던 거 같다. 이러한 식으로 소유는 긴장을 낳는다. 불교는 이완하기 때문에 죽음의 종교다. 반면 기독교는 긴장을 하기 때문에 생명의 종교이다.

 

불교는 온몸의 힘을 빼고 이완시키는 반면 기독교는 수많은 생각중에서 한가지에 매달리기 위해 긴장을 해야 한다. 긴장이 풀리면 잡생각을 자동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36.5도로 유지하기 위해서 35도 37도 이 사이에서 끊임없이 온도를 높이고 내려서 그 중간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생명이라는 건 이러한 긴장을 못 맞추면 파괴된다. 즉 이완의 종교인 불교는 죽음, 긴장의 종교인 기독교는 생명을 중요시하고 불교는 내려놓음과 버림, 기독교는 성공과 성취에 집착하게 된다.

 

즉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적인 내가 기독교의 성취적인 삶을 안좋게 본 것이었지만 수행방식의 차이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보고 좀 마음의 안정을 취하였다.

 

3.내향적과 외향적

불교는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는 것으로 내향적이다. 수행자체가 많은 사람들이 친해져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와의 싸움인 것이다. 기독교는 서로 찬송도 같이 하고 연극도 같이 하고 서로 여럿이 모여서 하는 외향적 종교이다. 내향적이라는 것은 내 안으로 에너지를 보내는 것이라 자신의 성찰에 관심이 있고 외향적인 것은 내 밖에 에너지를 보내 다른 사람들과 떠들석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서양은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동양은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의한 동서양의 외내향적 차이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불교는 혼자, 기독교는 여럿이 하는 것이다.

 

4.기독교는 너무 허무맹랑한 논리

처음에 기독교는 논리가 안 맞는 것이다. 연역적인 관점에서는 대 전제가 틀리면 그 논리과정이 아무리 완벽하다라도 그 논리는 틀린 논제가 된다. 즉 기독교는 신이 존재한다는 대전제에 있으므로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휴지조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과적 학문을 공부하다보니까 그게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무엇을 가정적으로 해서 학문을 발전시킨다. 이상기체 방정식은 이상기체라고 가정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많은 발전을 일으켰다. 이러한 식으로 확실하지 않은 가정정도가 아니라 완전 완벽하지 않은 가정을 통해서 많은 과학의 발전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학문에는 확실치 않은 가정이 매우 중요하고 그것이 학문하는 방식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를 잠깐 공부하였는데 경제라는 것은 가정을 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여 수학적 모델링을 만든다음 그 모델링이 얼마나 현실 설명력을 갖는지 보는 것 같다. 복잡한 현실을 분석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가정을 해야 하며 단순화하고 그것이 현실설명력이 있는듯이 보듯이 복잡한 현실세계를 성경이라는 틀이라는 가정안에서 삶에 투영하여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낮은 수준의 가정을 통해 높은 수준의 정신적 성숙과 강함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효용성이 있는 것이고 아예 가정하지 않고 그냥 인생 사는 것보다 삶의 활력과 강한 정신적 성숙을 겪는다면 기독교의 논리가 부족하다고 기독교 믿는 사람을 어떻게 욕할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5.기독교는 도취적

기독교는 무당처럼 방언을 하고 울기도 하고 그게 마음에 안들었다. 불교는 조용한 종교라서 적응하기 쉬운데 기독교는 적응하기 힘든 것이다. 이건 예술이론 중 니체는 디오니소스적과 아폴론적으로 분류했는데 그 이론에 대해 자세히 알면 불교의 방언이나 울고불고 하는 것이 무당적인게 아니라 오히려 광기있는 고차원적인 수준일수 있는데 내가 지식이 적고 이성중심적으로 생각해서 그런거 같다.

 

균형, 조화, 절제, 질서, 이성, 지식, 평안함이 아폴론적이고 도취, 극단성, 무질서, 본능, 광란, 환상, 열광은 디오니소스적인 이미지이다. 아폴론의 세계는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요, 디오니소스의 세계는 광기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존재의 일상적인 범위와 한계를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추구한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극단으로 가는 길은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고 믿는다고 한다. 반면에 아폴론적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용을 지키고 정열적으로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시민으로서의 명예를 잊지 않는 유형인 것이다. -인터넷-

 

따라서 나는 아폴론적이어서 기독교에 적응이 안되는 거지 기독교는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방편이 있고 그것을 슬기롭게 조화시켜야 되며, 무당이라고 욕안하게 되었다.

 

6.죄의식 강조

니체는 안티크리스도에서 죄의식을 강조하여 기독교가 싫다고 하였다. 아까 처음에도 말했듯이 유목민족은 남성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아버지는 정신의학적으로 초자아를 형성한다고 한다. 기독교의 죄의식은 유목민족이라서 아버지적인 성격을 가지는데 아버지는 초자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기독교란 종교로 판타지를 설정한 것을 보면 마녀사냥 같이 죄를 지은 사람을 잔인하게 처벌하는 정의로운 악마 컨셉으로 등장할 정도로 매우 정의로운 초자아 형성에 기여한다. 그리하여 죄를 강조하는 것 같다.

 

7.선과 악의 대립

기독교는 선과 악이 대립한다. 하나님은 왜 악마를 만들었는가? 악마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의 시련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기독교인이 나에게 기독교에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의문이라고 하였다.

 

기독교가 생겨난 중동지방은 사계절이 없고 일교차가 매우 커서 선과 악의 대립이 크고 둘의 극단적이며 사계절이 없고 농경사회가 아니라 변화의 묘가 생기지 않아서 영원을 강조하는 것 같다.

 

동양은 일원론적이다. 불교는 윤회론, 주역은 64괘가 순환한다. 그 이유는 농경사회라서 밤과 낮의 대립이나 여름과 겨울의 대립을 하나로 승화시켜서 모든것은 순환한다는 그러한 철학을 갖는다.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빛과 어둠, 정의와 악마의 싸움은 유목민족이라서 농경사회의 순환적인 철학적 마인드와 달라서 이원론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밤과 낮의 대립을 하나로 보지 않고 극단적인 이원론적으로 발전했고 악마가 왜 생겨서 우리를 괴롭히는가? 의 문제는 기독교도 인간이 만든것이기에 다만 기독교의 사상이 생겨난 곳이 유목민족인 사막이기에 낮과 밤의 대립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도 악마도 인간이 만든것이고 단순히 악마의 존재는 중동지방의 사계절의 유무와 일교차의 차이에서 나온 상상력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불교는 윤회론적인 입장에서 농경사회이기에 악마의 역할을 다소 크지 않은것으로 생각된다. 더 생각을 이상하게 가보자면 불교는 영원한 것은 없다고 가르친다. 모든것은 순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순환의 논리가 없어 극단적인 영원을 추구할것 같다.

 

출처 :  http://blog.daum.net/ytsdragon/4